여름
여름철 행사
집안 아낙네들이 준비해 온 쌀밥과 짠지, 배춧국 등에 막걸리를 곁들여 아침을 든다. 예전엔 ‘대방 앉힌다’고 하여 품앗이 일을 처음 나온 젊은이 길들이기를 했다. 논의 흙을 논두덩에 퍼 놓고 젊은이를 들어 그 흙에 처박았다.
모내기 직업은 먼저 일꾼 몇 명이 ‘모춤’을 지게에 져 나르고, 나머지 일꾼들은 모두 갈을 꺾어 넣은 논에 들어가 모를 심는다. ‘줄꾼’ 2명이 줄을 잡고 아이들은 ‘모잽이'(모를 심는 사람) 뒤에서 ‘모춤’을 대준다. 일본강점기에는 ‘물칸'(줄과 줄 사이의 간격) 5치, ‘주먹칸'(모와 모 사이의 간격) 5치로 심었으나 해방 후에는 ‘물칸’ 8치 ‘주먹칸’ 3, 4인치 정도로 심었다. ‘모잽이’ 1명당 하루에 약 1마지기(100평)을 심었다. ‘아침제눌'(오전참)을 주는 집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아침제눌’이 없었다. 점심은 아침보다 풍성했다. 반드시 두부나 고기반찬이 들어가야만 했다고 한다. 일본강점기에는 저녁 식사도 제공했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그게 생략되고 대신 4시 5시경에 ‘저녁제눌’을 주었다. 식은 밥이나 국수에 막걸리를 곁들이는 간단한 요기였다.
모내기가 끝나고 한 달 정도 지나 품앗이로 ‘애이짐'(초벌김)을 맨다. 호무(호미)로 김을 찍어 뒤집어엎는데, 일꾼 1명이 하루에 약 2마지기 정도를 맸다. 해방 이후 미는 기계(제초기)가 들어오고 나서 약 4마지기 정도를 맬 수 있었다. 논에 김매러 나갈 때는 풍물을 쳤으며, 새참을 먹을 때에도 논두렁에 나와 한참 동안 쇠를 두드렸고, 또한 김매고 돌아올 때도 농악을 쳤다. ‘애이짐’을 매고 나서 ‘두벌짐’을 훑는다. 호무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김을 훑고 피를 뽑아낸다. ‘애이짐’과 ‘두벌짐’을 맬 때는 五時를 다 주었다. ‘세벌짐’은 매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피만 따냈다. 초복 때에 ‘이른 모’는 이미 이삭을 맸다.
늦어도 말복까지는 대부분의 벼가 다 팼다. ‘白露 때, 아침에 팬 벼는 먹어도 저녁에 팬 벼는 못 먹는다.’라는 말이 예전부터 있었다. 초복과 중복 무렵에 메물(메밀)을 푼다. ‘매복'(중복과 말복 사이가 10일인 경우)이 드는 해에는 초복에 메물을 풀고, ‘월복'(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인 경우)이 드는 해에는 중복을 지나 메물을 풀었다. 평밭 역시 ‘애이짐’과 ‘두벌짐’을 맸다. 이상과 같은 모내기와 김매기 작업을 전후하여 아래와 같은 행사들이 행해졌다.
하지
복놀이
칠석
그 눈물이 비가 되어 칠석날에는 반드시 비가 온다. 또 이날 여자들은 田地가 (논밭)에 가지말라고 했다. 논밭에 나가 입을 놀리면 신령님이 노하시기 때문이다. 칠석날을 전후하여 벼이삭이 패갈 무렵, 집안의 대주(가장)들은 논이나 밭에 나가 적을 부쳐 기름내를 피운다. 적은 주로 감자를 갈아 밀가루를 섞어 지진 것으로, 이것을 뜯어 논이나 밭에 던져 놓으면 ‘자리’와 같은 병충해가 안생긴다고 한다. 어떤 집에서는 나무 꼬챙이 끝에다 한지를 접어 끼워 논두런에 세워놓고 그 밑에 부치개를 바치기도 한다. 또한 산에 가서 냄새가 아주 독한 ‘느암대'(苦蔘)를 베어다가 장대 끝에 묶어, 벼를 털고 다니면 벌레들이 대부분 다 떨어진다. 요즈음은 ‘느암대’ 대신에 농약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