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을철 행사
‘마당질'(탈곡작업) 날이 잡히면, 그 전날 일꾼을 사서 지게로 ‘태단’을 나른다. 농사를 많이 하는 집에서는 운반된 ‘태단’을 마당 한구석에 둥그렇게 쌓아 ‘짚가리를 가린다.’ ‘짚가리'(‘벳가리’라 부르기도 한다.)는 먼저 지면에 ‘북대기'(짚)를 수북이 깔아, 그 위에 벼 이삭이 올라앉게끔 한다.
그리고 ‘태단’의 이삭 부분을 안쪽으로, 밑동 부분을 바깥쪽으로 하여 원통형으로 쌓아 올린다. 이렇게 하여 어느 정도 쌓아 올라가게 되면, 점차 ‘짚가리’의 직경에 줄여 꼭대기에 이르러서는 삿갓 모양이 되게 한다. 그리고 그 맨 윗부분에는 ‘태단’의 밑동 부분을 안쪽으로 이삭 부분을 바깥쪽으로 하여 빙 둘러 올려놓는다. 그래야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않고 이삭을 타고 밖으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이 ‘짚가리’에는 ‘주저리’를 씌우지 않는다. ‘낫가리'(밭작물의 집적물)에는 반드시 ‘주저리’를 해 씌우지만 ‘짚가리’에는 그리하지 않는다. 대농가에서는 이 ‘짚가리’를 이중으로 쌓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즉, ‘태단’의 이삭 부분을 안쪽으로 밑동 부분을 바깥쪽으로, 그리고 그 밑동 부분의 바깥에 바로 또 다른 ‘태단’의 이삭 부분이 오게끔 두 겹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다.
벼 베기를 전후하여 미리 ‘마당을 밟아 놓는다.’ ‘마당질'(탈곡작업)의 준비를 해 놓기 위해서이다. 먼저 진흙을 퍼다 마당에 골고루 깐 다음, 물을 뿌리고 입지(볏짚의 속대로 만든 빗자루)로 쓸어내어 그 위에 조이거나 왕겨를 뿌려 놓는다. 그 진흙이 터져 틈새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탈곡작업의 준비가 끝나게 되면 날을 잡아 ‘마당질’을 한다. 먼저 벼의 경우는 절구를 마당 한 가운데에 엎어 놓고, ‘태단’을 삼으로 꼰 ‘탯줄’에 매어 어깨 위로 올려 좌우로 한 번씩 절구에 내려쳐 ‘태질’을 한다. 예전 일제시대 때 심었던 벼는 ‘관산도’, ‘소년도’, ‘ 장녹두’, ‘거창벼’ 등으로 이렇게 두 번 정도 ‘태질’을 하면 알곡이 대부분 다 떨어졌다. 요즘 벼와 달리 꺼치랭이(까끄라기)가 길고 많으며, ‘귀(벼이삭의 관절)가 연한 벼’이기 때문이다.
발로 밟는 탈곡기가 들어오고 나서는 두 줌(두주먹)을 묶어 ‘기계단’을 만들었다. 탈곡기에 의한 ‘마당질’은 대부분 둘이 밟고 하나가 옆에서 ‘기계단’을 메겨준다. 한사람이 탈곡기에 ‘기계단’을 펼쳐 속에 숨어 있는 알곡까지 모두 털어내어(이를 ‘짚털이’라고 한다) 옆으로 던진다. 단, ‘무논’의 벼를 수확할 경우에는 밑동을 벤 벼를 소나무가지 위에 올려 논두렁으로 끌어 올린 다음, 논두렁이나 물이 없는 곳에 깔아 말린다. 그리고 이것들을 묶을 때는 커다란 ‘뭇 단’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뭇 단’을 떨어낼 때에는 먼저 옆에서 누군가가 ‘뭇 단’을 풀어 일일이 한 줌씩 내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알곡을 떨어낸 다음에도 짚을 또 누군가가 묶어야만 했다. 따라서 ‘뭇 단’의 경우는 거둘 때는 한꺼번에 많은 벼를 묶기 때문에 작업이 간편하지만, 탈곡할 때는 ‘낱단'(‘태단’관 ‘기계단’)의 경우보다 훨씬 작업진행이 더딘 편이었다.
‘마당질’이 모두 끝나고 나면 짚단을 마당에 쌓아 ‘짚가리를 가린다.’ 집적방법은 앞의 벼 이삭이 붙은 ‘짚가리’의 경우와 같다. 떨어낸 알곡은 바람에 날려 꺼치랭이나 먼지를 없애 멍석에 말린다. 여자들의 경우는 주로 치(키)로 쳐내고, 남자들의 경우는 참자리로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털어낸다. 멍석에 깔아말린 알곡은 섬에 넣어 보관하거나, 광에 있는 대독(大甕)에 넣어둔다. ‘두지'(사진1, 2참조)를 갖고 있는 집에서는 나락을 그 안에 넣어 저장한다. 농사를 많이 하는 집에서는 마당에 ‘벳섬’을 둥그렇게 쌓아 ‘노적가리’를 만들어 놓기도 한다. 씨나락의 경우는 잘 익은 것을 골라 섬에 넣어 안방이나 두지 등에 보관한다. 씨나락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반드시 한 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자리를 옮기게 되면 발아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굶어 죽어도 씨나락 섬은 베고 죽는다’고 한다.
한편, 밭농사의 경우는 추석을 쇠고 나서 수확작업을 한 다음, 어느 정도 마르면 아침 저녁에 틈을 내어, 여럿이 산에 가서 ‘울력’으로 져온다. 새벽에 일 나가기 전이나 저녁에 일 끝나고 가서 져와야 하기 때문에, 가을철 한창 바쁠 때에는 신발끈도 못 풀고 짚새기를 신은 채 잠을 자기도 했다. 마당으로 운반해 온 밭작물을 대부분 ‘낫가리’를 해 놓는다. ‘낫가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높이 2 3미터 정도의 서까래 굵기의 소나무를 베어다 가지를 잘라내고 ‘어릿대’ (‘얼럭대’라고도 한다)를 세운다. 먼저 ‘어릿대’ 3개의 끝을 칡으로 묶어 세우고, 다음 그 사이 사이에 ‘어릿대’를 하나씩 끼워넣어 모두 5개를 원추형으로 세운다. 그리고 지면에서 약 30센티 간격으로 칡넝쿨로 ‘얼럭테’를 두른다. 이렇게 하여 ‘어릿가리'(사진3 참조)가 만들어지면, 먼저 조이나 콩, 팥 등의 다발을 ‘어릿대’주변의 지면에 빙 둘러 세운다. 그리고 그 다발의 이삭 부분이 ‘어릿가리’의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다른 다발의 밑동 부분을 밖으로 내어, 칡넝쿨의 테에 기대어 비스듬히 쌓아 올린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게 되면, 결과적으로 ‘어릿가리’의 안쪽에는 이삭 부분이 들어가고 바깥쪽에는 밑동부분이 나오게 된다. 또한 원추형 ‘어릿가리’ 꼭대기에는, 볏짚이나 조이짚을(요즈음엔 비닐) 한 다발 묶어(이삭이 달렸던 부분을 묶는다) 삿갓 모양으로 밑동 부분을 벌려 씌워 놓는다. 이를 ‘주저리’라 한다. 이렇게 완성된 밭작물의 집적물을 ‘낫가리’라 하며, 그 집적 대상 작물의 종류에 따라 각각 ‘조이까리’, ‘메물까리’, ‘콩까리’, ‘팥까리’ 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낫가리가 千이라도 주저리가 으뜸이다’라고 하듯이, ‘주저리’를 잘못 씌워놓으면, 빗물이 ‘낫가리’에 들어가 일년 농사를 망치기도 한다.
메물(메밀)은 ‘낫가리’를 만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메물을 베자말자 밑동 부분을 묶어 다발을 만들고, 이삭 부분을 다발 안에 접어넣은 다음 그 상단부분을 묶어 놓는다. 메물은 ‘귀가 연해’ 잘 떨어지기 때문에 이처럼 다발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가, 어느 정도 건조된 다음 집으로 져나른다고도 한다. 수꾸(수수)의 경우는 이삭을 낫으로 잘라 그 이삭다발을 처마에 매달아 건조시키기도 하고, 수꾸농사를 많이 하는 집에서는 ‘횟대'(‘橫丈’이라고도 한다)에 걸쳐 말리기도 한다. ‘횟대’란 Y자형의 ‘말복'(支柱)을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 걸치는 장대를 말한다. 이렇게 건조시킨 밭작물의 ‘마당질’은 도리깨를 사용한다. 요즈음은 기계로 콩을 떨기도 하고 또는 철사로 맨 도리깨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도리깨는 원래 물푸레나무를 떠다가 만드는 게 정상이다. 콩이 깨지거나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엔 ‘도리깨 아들’뜨러 간다고 7월께 산에 가서 물푸레나무를 떠다가 반듯하게 펴말려서 사용했다. 떨어낸 곡물을 통방아나 발방아(디딜방아)에 찧는다. 일제시대에 물방아(물레방아)가 들어오고 그 이후에 기계방아가 나왔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농작업 사이에 치루어지던 행사는 다음과 같다.
추석천신과 ‘9일차사’
서낭제사
대왕단지모시기
단오 이전까지 이 ‘대왕단지’의 쌀은 절대 손을 대서는 안되고, 단오 이후의 모심기나 김매기 작업과 같이 필요할 때 조금씩 떠다 사용한다.
텃고사
‘텃고사’ 당일 각 집안의 안대주는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제물 준비를 한다. 먼저 그해 거둬들인 햇곡식으로 팥시루떡과 백설기를 만들고 메밥을 짓는다. 그리고 무우채국을 끓여, 성주님을 모시고 있는 상기둥 밑의 마루에 참자리를 세우고 그 앞에 상을 차린다. 마루가 없는 집에서는 안방에 상을 차린다. 상 위에는 떡을 시루채 올리고, 쇠주발에 쌀도 담아 올리며 또한 밥과 무우채국 김치짠지 등을 올린다. 상 한쪽 옆에는 창호지를 한 장 장방형으로 접어 올리며, 소지 역시 식구 수대로 올려놓는다. 이윽고 음식이 갖춰지면 당일 저녁이나 새벽에 ‘텃고사’를 지낸다. 대주가 배례를 하며 오곡풍양에 대한 감사와 가내안태, 자손번창을 빈다. 어떤 집에서는 ‘복술'(복수)을 올려 ‘텃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식구들의 소지를 올리고, 장방형의 창호지를 고무락(안방 천정 위) 위의 상기둥에 실타래로 붙들어 맨다. (사진5 참조)
이처럼 매년 ‘텃고사’때마다 창호지를 상기둥에 한 장씩 붙들어 매며, 이 창호지들은 대주가 바뀔때 손 없는 곳에 가서 사른다고 한다. ‘텃고사’가 끝나면 음식을 내려 가족끼리 음복을 하고 나서, 떡을 이웃에 골고루 나누어 준다.
집안에 따라서는 이 창호지 안에 쌀과 동전 몇 개를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또한 성주님을 위하고 나서 부뚜막 구석에 음식을 따로 차려 조왕님을 위하기도 하고, 장독옆에 음식을 차려 토주지신을 위하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텃고사’를 지내는 집은 한 집도 없다.